달력

허익구 논설주간 | 기사입력 2014/12/19 [17:31]

달력

허익구 논설주간 | 입력 : 2014/12/19 [17:31]

▲ 허익구 시사우리신문 논설주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교수     ©시사우리신문편집국
아버지의 방에는 한 장으로 된 달력이 소중한 그림처럼 붙어 있었다. 일 년 열두 달 절기에 따른 농사일정과 간단한 생활 정보들이 적혀있는 것이었다. 어느 해에는 지역 국회의원 얼굴이 반 이상을 차지하는 전단지 같은 것이 붙어있기도 했다.
 
요즘 같으면 선거법에 위반될 법도 한 일이지만, 물질도 궁핍했고 더군다나 달력이 귀한 대접을 받던 그 때, 나누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여겨졌던 그런 시절이었다.

해가 바뀌기 무섭게 새로운 달력이 붙는다. 모서리와 가운데에 밥풀을 꼭꼭 눌러 바른 뒤, 지난 달력이 붙었던 자리에 새 것을 붙였다. 조금만 비뚤어져도 달라진 색깔의 벽지가 삐져나오기 때문에 정성을 다하여 조심스럽게 붙여야만 했다.
 
도배를 하지 않는 한 달력은 늘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숫자 외에는 몇 자 적히지도 않은 그 달력에서 무엇을 찾으시려는지 아버지께서는 자주 달력을 들여다보시고는 혼잣말로 ‘오늘은 못자리 만들 볍씨를 담가야겠다.’ 하시는가 하면 때때로 빼곡하게 적힌 숫자들이 잘 보이지 않는지 호롱불을 들고 무엇을 계산하는 것처럼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기도 하셨다. 어느 날짜에는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기도 하고, 무슨 글자인지 알 수 없는 것을 적어 놓을 때도 있었다.

달력이 그렇게 소중한 줄은 나이가 제법 든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가끔 농사일을 거들 때면 아버지는 절기에 따른 농사일을 이야기 해주시곤 했다. 때문에, 어느 때 쯤에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

이제는 달력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가 없다. 하루에도 몇 번씩 달력을 보기도 하고 날짜 밑에 그날의 할 일들을 몇 개씩 적어 놓곤 한다. 어떤 날은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해야하기 때문에 기록을 하지 않고는 낭패를 보는 경우가 있어 달력은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예나 지금이나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 늘 함께해왔던 그것도 세태에 따라 많이 바뀌었다.

그 옛날 한 장짜리 달력과는 달리, 품질이 좋은 종이로 만든 열두 장짜리 달력을 넘겨보면 마치 새로운 세계를 여행하고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다. 경제여건이 좋아지면서 이제는 달력도 흔하여 연말이 되면 몇 개씩은 그저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책상위에 올려놓을 한두 개를 빼고는 대부분 찬밥처럼 푸대접을 받다가 어느새 눈에서 사라지고 만다. 더군다나 핸드폰이 생긴 이후, 굳이 좁은 벽면에 어울리지 않게 달력을 걸 필요도 없거니와, 필요 이상의 물건들은 주변을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내게는 해가 바뀌어도 버리지 못하는 특별한 달력이 있다. 만능 엔터테이너인 임교수가 보낸 것이다. 해가 지나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이 세상에서 오로지 하나 밖에 없는 달력이기 때문이다. 다재다능한 그는 사진 찍기를 좋아하여 만날 때마다 한 컷씩 촬영을 했다. 때로는 식당에서도 찍고, 어느 때는 어두운 노래방에서 소주 한 잔에 취해 불그레한 나의 흐트러진 모습을 찍어 보내주기도 했다. 이런 일상들의 사진은 한 번 보고 지나갈 뿐 대부분 지워버리기 일쑤다. 가볍게 흘려버릴 사진 속에서 재미난 것들을 골라 달력을 만들어 보내주었으니 어찌 소중하지 않겠는가!

해도 지난 달력들을 책상 가까이 두고 가끔씩 들쳐본다. 변해가는 내 모습을 비교해 보기도 하고, 조명등 아래 마이크를 잡고 익살스럽게 노래 부르는 모습을 회상하며, 각박한 삶속에서도 시간의 흐름과 편하게 만난 친구들을 떠올리며 잠시나마 즐거운 미소를 짓게 한다.

일기를 쓰지 않는 사람은 역사가 없는 사람이라고 말해온 내가 어느 날부터 일기를 쓰지 않게 되었다, 어쩌면 사진기록들에서 흘러간 시간들을 볼 수 있는 것도 한 가지 이유가 되어 버렸기 때문일까? 컴퓨터 하드드라이브에 연도별로 폴더를 만들어 사진을 저장해 두었다. 사진의 기록들이 점점 나의 역사가 되어가고 있다. 이런 소중한 역사 속에 내가 쓰지 못한 나의 야사를 기록해둔 이 소중한 달력을 몇 해가 지나간들 어찌 버릴 수가 있겠는가?

올해도 나만을 위한 달력이 우체통에 있을까? 정년퇴직을 하고, 새로운 길을 개척한 임교수의 바쁜 여정으로 추억어린 달력을 만들지 못할 것 같은 아쉬움 속에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는 놓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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