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려 유물 기증 관련 칼럼] 혼서-호구단자-준호구-호패-장택기-분재기를 아시나요?- 초려 가문 유물의 가치와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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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려 종중 어르신들과 학계 및 지역 인사 등 10여명이 참석하였는데 모이는 시간은 11시였다. 나는 유물을 만난다는 설레는 마음으로 서둘러 9시에 도착했다.
박물관은 폐교된 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한 건물이었으나 우측의 수장고는 신축한 듯 새로워 보였다. 나는 운동장 구석의 시원한 느티나무 그늘에 앉아 선조들의 삶과 유물을 생각하며 고즈넉한 정취를 만끽하였다.
초려선생의 유물을 비롯한 초려가(家)의 유물이 세종시에 기증된 날은 2월 28일이었다.
그날 세종시청에서는 뜻 깊은 기증 행사가 있었다.
기증한 초려 유물의 독립된 공간 전시를 통한 학술연구와 교육자료로써의 활용방안, 초려전집 출판, 초려묘역과 초려 유물에 대한 추가적인 문화재 지정, 관내 도로 중 초려로(路) 개정 모색 등 의미 있는 내용도 있었다.
또한 기증 유물 중에서 교지, 서적, 호패, 표주박 등 고문서, 고서적, 민속유물 일부가 전시되기도 하였다.
‘기탁’과 ‘기증’의 차이는 무엇인가? 기탁은 물건을 맡기고 상대편이 이를 보관하는 행위이다.
기증이란 물건을 상대편에게 아주 넘기는 행위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소유권이 달라지는 큰 차이가 있다. 20여 년 전 초려 종중에서는 종가 옆 서원에 보관되어 있던 유물 일부를 도둑맞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다.
그때 종중에서는 유물 절도의 위기의식을 느끼고 부랴부랴 공주대학교 박물관에 기탁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수장된 유물로써 대중이 접하기에는 낯설었다. 유물을 통하여 배우고 느낄 수 있는 효과가 부족하였다.
그래서 이번에 종중에서는 기탁을 기증으로 바꾸어 소유권을 완전 이전하는 통큰 결단을 하게 된 것이다. 또한 이는 종중에서도 기증으로 고쳐서 행정수도 기관에 일임하는 것인 만큼 보관 관리의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원래 과거에 연기군이었던 세종시는 조선시대에는 공주목(牧) 관할이었다. 현재의 유성, 대전, 연산, 논산 지역도 마찬가지로 공주 관내였다.
이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상전벽해 되어 국토의 행정 중심지로 세종특별자치시가 생겨나고 새롭게 박물관을 지어 행정수도의 위상에 걸맞게 새로운 뿌리를 찾아 전시를 통해 교육자료로 활용하고자 한다 하니 금상첨화였다.
초려 선생이 살아 숨쉬기는 당시 공주 동부면이었으나 현재는 세종시의 초려역사공원이라는 만년유택에 계시니 명분도 딱 들어맞았다.
기증된 초려가(家) 유물은 총 187점이다. 고문서로 121점, 고서로 47점, 민속유물로 19점 등이다.
주로 임진·병자 양란 사이에 초려선생이 태어난 시기인1607년부터 조선이 망국의 한을 머금은 1910년까지 300여 년간의 유물이다. 주로 초려 당대와 그 이후의 10대 종손까지 대략 11세대에 걸쳐 살아온 삶의 흔적이다.
유물의 목록을 보면 선조들의 삶의 애환을 느낄 수 있다. 종가의 어려운 삶 속에서도 검소하고 겸손하며 선한 삶을 면면히 이어 왔다.
사치를 금하고 검소하였으며[禁侈習 崇節儉],예절을 존숭하여 겸손하였고[崇禮], 철저한 준법의식으로 선한 삶[向善]을 살아 왔음을 기증된 유물은 보여 준다.
121점의 고문서는 주로 초려 선생부터 10대 종손까지의 자료이다. 아울러 관련 문서가 종손을 중심으로 하여 작성되고 수취된 자료이다. 지손과 얽혀진 자료도 많기는 하다.
47점의 고서적은 초려선생의 저서나 초려 관련 저서가 중심으로 되어 있으며 초려에게 국가에서 하사된 서책들도 기증되었다.
종손과 지손들의 관련 책들도 있다. 19점의 민속 유물은 종손 대대로의 호패와 인장 중심으로 되어 있고, 생활도구로는 단지 옥관자와 호박관자, 표주박 2점이 있을 뿐이다.
다른 민속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여타의 생활도구는 전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초려가문에서는 생활도구는 특별한 유물로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듯하다. ‘물질보다는 정신문화를 더 오롯하게 소중히 간직하였구나.’하는 느낌이 든다.
고문서에는 부분적으로 결락(缺落 :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감), 천공(穿孔 : 구멍이 뚫림), 충훼(蟲毁 : 좀벌레에 의해 훼손됨)된 부분이 많다. 종가의 사랑채에는 보관 관리 전문가가 없었다.
따라서 유물 보관에 대한 전문적 기술도 부족하였다. 가장 중요한 통풍이나 온도, 습도를 항시 유지하고 맞출 수가 없었다.
다만 아마추어의 투철한 정신으로 최선을 다해 보존하고 간직했을 뿐이다. 다행스럽게도 현재는 공주대와 세종시의 학예연구관들이 문서의 결락·천공·충훼로 훼손된 부분을 여러 자료들을 고구하여 추정해 놓았다. 이들의 연구 노력에 진정으로 감사한 일이다.
기증된 유물 187점은 매우 다양하여 한마디로 정리하여 기술하기는 어렵다. 아마 전국에서도 한 가문의 유물이 이렇게 수효도 많고 다양한 예는 아예 없을 것이다.
그런데 모두가 실생활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유물이다. 다만 생활도구로 쓰였던 물건들이 없고, 고서적과 고문서 중심인 것은 그만큼 선비의 정신문화를 숭앙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양한 기증 유물 중에서도 대대로 이어진 유물을 한사람의 일생으로 견주어 서술해 보고자 한다.
혼서-호구단자-준호구-호패-장택기-분재기 유물을 중심으로 차례대로 전개한다.
이 유물들에 대한 언급이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전환된 지금의 시기에 가족의 소중함을 새롭게 인식하고, 출산 장려의 울림으로 다가갈 수 있다면 더욱 고마운 일이다.
혼서(婚書)는 혼인할 때 신랑 집에서 예단과 함께 신부 집에 보내는 서찰이다. 이 서찰에는 신랑의 생년생월생일생시(時)가 들어 있다. 피봉[겉봉투]도 함께 보관되어 있다. 봉투 속에 담겨 보관된 만큼 결락·천공·충훼도 많다.
기증한 유물 중에 혼서는 7점이 있는데 1910년에 결혼한 10대 종손의 혼서가 가장 최근의 것이다.
혼인은 이성지합(二姓之合)으로 새로운 가정의 탄생을 알리며 자녀 출산을 예고한다. 옛날에도 사회현실은 각박했을 것이다. 그래도 혼인만큼은 필수적으로 여겼고 인륜지대사로 중요하게 생각했다.
오늘날의 인식하고는 너무도 달랐다. 고려 말 공녀 차출로 인해 차출을 당하지 않으려고 조혼 풍습으로 서둘러진 바가 있다. 남자는 장가를 가지 않으면 어른으로 취급도 안했다.
다음은 호구단자(戶口單子)와 준호구(准戶口)이다. 결혼을 하고나면 새로운 가정이 생기고 아이들이 태어난다. 옛날 대가족 속에서는 3·4대가 모여 사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었다.
호구단자와 준호구는 오늘날로 말하면 한 가구의 주민등록이나 호적등본과 같은 것이다. ‘단자(單子)’는 사람이나 물건 따위의 내용을 적은 종이나 문서를 말한다. ‘준(准)’은 기관에서 승인해 주는 행위를 말한다.
그러므로 호구단자는 자기 가족의 인적 구성을 기록하여 관청에 제출하는 서류였다. 여기에는 노비도 포함되어 있었다. 준호구는 개인 가정에서 제출한 호구단자를 바탕으로 점검한 후에 관청에서 그 가정을 승인하여 발급하는 서류였다. 호구단자는 1759년 초려 4대 종손의 것으로부터 7점이 있다.
1792년의 호구단자에는 호적단자라는 명칭도 있다. 준호구는 1681년 초려 아들의 것으로부터 무려 13점이 있다.
초려의 장손인 이단몽의 준호구에는 1687년, 1690년, 1705년, 1708년, 1711년, 1714년의 자료로 무려 7점이 있다. 문서를 보면 대략 3년을 주기로 호구조사가 이루어 졌다.
합쳐서 20점이 전하지만 유실된 문서가 가장 많은 것이 호구단자와 준호구라 추측된다. 준호구의 발급관청 명칭도 다채로운데 공주관(官), 공주현(縣), 공주목(牧)으로 되어 있어 관청의 호칭 변화도 살펴볼 수 있는 것은 덤이다.
호패(號牌)는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 16세 이상의 남자가 지녔던 패를 말한다. 문화재 등록사항으로는 이 기증 유물 중에 호패만은 문서가 아니라 민속자료에 등록되어 있다. 직사각형으로 앞면에는 이름과 태어난 해의 간지가 적히고 뒷면에는 발급관청의 낙인이 찍혔다.
호패는 반드시 호구단자와 준호구를 근거로 하여 발급될 수 있었다. 초려가문 유물 중에는 초려부터 9대손까지 9점이 전한다. 10점이 아닌 이유는 초려 큰 아들의 호패만이 유실되었기 때문이다.
32세라는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났기에 미처 챙겨지지 못했나 생각된다. 호패와 유사한 민속자료로 인장(印章)이 있는데, ‘이태지(李泰之)’라 표기된 초려의 인장부터 합하여 6점이 있다. ‘태지’는 초려선생의 자(字)이다.
호패(號牌)는 호구(戶口)인 가정에서 사회로의 확대·확산을 의미한다. 기증한 유물 중에 사회활동을 담은 것에는 과거시험 합격을 증빙하는 백패(白牌) 2점, 벼슬을 알리는 교지(敎旨)나 교첩(敎帖) 6점, 임금의 뜻을 알리는 유지(諭旨) 5점, 오늘날 봉급명세서 격인 1649년의 이유태 녹패(祿牌) 1점, 각종 상소문과 등장(等狀) 초안, 발송 통문 초안과 수취한 통문, 이첩된 공문인 관문(關文), 건축물이나 산수 유람을 적는 한문 문체 글인 기(記), 시권(詩卷), 간찰(簡札), 종중(宗中)입의(立議), 수표(手標 : 현재의 은행 수표(手票)와는 다른 물건을 대차할 때 주고받는 증서) 등의 고문서가 있다.
모두 호패를 지녔을 때의 활동을 상징하는 고문서 유물들이다.
기증한 서책으로는 임금에게서 하사 받은 경서류나 초려선생유고(遺稿), 초려연보, 초려행장초, 초려정훈, 사례홀기 등 47점의 기증한 고서적들도 대부분 호패를 지닌 시절에 읽고 쓰며 접했던 자료들이다.
이 유물들은 이미 다수가 1988년 충남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최근의 서책으로 특이한 것은 성암집이 있는데, 성암이 지은 여성의 항일의식을 담은 내범요람(內範要覽)이 있으며, 옥중문답·옥중서찰·옥중시가를 담은 부풍옥중일기(扶風獄中日記)가 있다.
성암 이철영은 초려의 9대 종손 이하영의 동생으로 비폭력 항일독립운동가였으며 옥고와 탄압으로 인하여 1919년 54세에 서거하였다.
장택기(葬擇記)란 무엇인가? 이는 장기(葬記)라고도 하는데 고문서로 가장 생소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장택기는 초려 가문에서 가장 소중한 문서였다. 장택기는 사람이 죽고 나서 장례를 치르는 절차와 과정을 기록한 문서이다.
기증된 장택기마다 작성한 사람은 미상이고 주요 상주들이나 맏상주 혹은 승중손의 생년 간지가 들어 있다.
하관이나 안장한 날짜나 시간도 기록되어 있다. 기증한 초려가의 고문서 127점 중에 가장 많은 무려 33점이 장택기이다. 이는 부와 모 그리고 두 번째 어머니 상(喪)도 있었기 때문이며, 초려 가문이 장례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였는지 엿볼 수 있게 한다.
장택기 중 가장 큰 문서는 1743년 영조 계해년에 초려의 5대손 이광중 상을 치른 장택기인데, 주상(主喪)이 계사생의 재원, 병신생의 재형, 정미생의 재정 3형제로 되어 있는 것으로 가로 59㎝ 세로 41㎝이다.
그러나 초려 가문의 관혼상제 사례(四禮)는 결코 호화스럽거나 사치스럽지 않았다. 초려가 지은 사례홀기(四禮笏記)나 상소문 기해봉사에 담긴 금치습·숭절검·숭례 정신을 그대로 지켜낸 300년의 장엄한 장례의식 역사였다.
분재기(分財記) 또한 생소한 고문서이다. 이는 부모가 작고하고 나서 자손들이나 친척들이 재산을 나누는 것을 기록한 문서이다. 특히 이 분재기 문서는 특별히 화회문기(和會文記)라고도 하였는데 이에는 고인의 뜻에 따라 자손들이 화목하게 모여서 재산을 나누는 행위라는 뜻이 담겨 있다.
오늘날 유산상속 싸움으로 법정에 가는 집안에서는 이 화회문기를 유심히 살펴볼 일이다.
첫 화회문기로는 초려의 모친 청풍김씨 사후에 탈상하고 나서 초려선생을 포함한 다섯 집안 아들 자손들이 모여 1676년에 작성한 것이 있다. 1684년에 초려 사후에는 초려선생의 아들 네 형제들이 작성한 화회문기가 있으며 그 후손들이 다시 1684년 화회문기에 따라 재산을 나눈 1715년 화회문기가 있다.
또한 이러한 화회문기와는 별도의 분재기 문서로 1654년 초려의 장남 이옹(李顒)이 과거에 급제하자 그 장인인 윤문거(尹文擧)가 이를 기념하여 사위에게 전답을 별급하는 분재 문서인 별급문기(別給文記)도 있다.
혼서-호구단자-준호구-호패-장택기-분재기는 한 사람의 인생에서는 이 과정이 순서대로 차분히 이루어져 일어나지만, 300년 11대 대대로 자자손손 과정에서 보면 이러한 일들은 서로 갈며 들며 일어났을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에는 이 과정이 일직선으로 시작되어 끝났겠지만, 300년의 시간에서는 돌고돌아 선순환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 속에서 선조들은 삶의 애환을 몸소 겪어가며 생활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문서, 서책, 유물들을 수발하고 관리하며 보존하여 왔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다. 어떻게 이러한 보존관리가 가능했는지 그 투철한 선비정신 앞에 고개가 숙여진다.
이 유물들은 그야말로 300년을 한결같이 사치를 금하고 검소하였으며, 겸손한 자세로 예법을 지키고, 어진 인덕으로 선하고 의연하게 숭고한 삶을 이어간 위대한 가르침이다.
다행히 세종시립민속박물관에서 둘러본 수장고는 임시적이지만 만족할 만하였다. 세종시 담당관이 보관하는 과정을 설명하는데 전문가로서의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수장고 담당자들의 열의도 대단해 보였다.
과거 시골 종가에서 허름한 사랑채에 주먹구구식으로 관리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보관에 가장 중요한 통풍에서부터 온도와 습도 조절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시스템도 갖추고 있었다.
유물의 포장도 세심하게 잘 되어 있었다. 자손의 입장에서 보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귀중한 가치를 지닌 유물이라 하더라도 새로운 전시문화 창조를 위해 노력하는 기관에, 게다가 새로운 국가의 중심이라는 위상을 지닌 행정수도에 기증되었다는 사실이 조금도 섭섭하지 않고 뿌듯할 일이다.
앞으로 세종시에는 새로운 박물관이 들어설 예정이다. 지금 공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2025년 말에는 수장고에서 박물관 전시실로 옮겨질 것이라 한다. 이 초려 가문의 유물에는 고가의 금·은으로 된 것이나 유명 화가의 그림, 값비싼 도자기 같이 휘황찬란한 것은 없다.
그러나 그 유물에는 300년간 11대에 걸친 자자손손들의 물질적 욕망을 떠난 고고하고 고귀한 정신문화 역사가 살아 숨쉬고 녹아 있다. 이러한 정신문화 유물의 집합이 교육에서는 더 큰 가치를 지닐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개인적인 바람이라면 신축되는 박물관에 초려 가문 유물이라는 독립된 전시공간을 갖추어 혼서-호구단자-준호구-호패-장택기-분재기 순서로 하여 섹터를 할당하고 유물을 적당한 곳에 맞춤하여 배치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전문가들이 잘 알아서 전시 기획을 짜겠지만 관람자들이 자기 가정의 소중한 가치를 인식하면서, 이러한 마음으로 대대손손 이어가 자식을 낳아 기르고,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하고 나서, 저세상으로 편하게 떠나는 인생교훈을 얻을 수 있는 산교육 방향으로 전시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