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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깊어지는 길목, 새벽 어둠이 채 걷히기 전 집을 나섰다. 남들보다 조금 더 일찍 출발하면 여유롭게 담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그 마음은 이미 많은 이들의 마음과 같았던 모양이다. 전남 구례의 화엄사에 도착하니 아직 새벽 공기가 차가운 시간임에도 삼각대를 세운 사진가들과 봄을 맞으러 온 상춘객들로 절 마당은 활기가 가득했다. 누구는 가장 좋은 자리를 찾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고, 누구는 이미 피어난 봄의 절정을 눈에 담으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화엄사의 봄은 역시 화엄매에서 시작된다. 절의 역사와 함께 숨 쉬어 온 하나의 품격이었다. 세월의 흔적이 깊게 밴 줄기와 뒤틀린 가지는 마치 오랜 수행자의 손마디처럼 묵직했고, 그 위에 피어난 꽃은 놀라울 만큼 화려했다. 특히 홍매화의 매력은 말로 다 담기 어렵다. 그 색은 더 깊어진다. 아침 햇살을 머금은 꽃잎은 붉다 못해 흑색으로 느껴질 만큼 짙고 농밀했다. 검붉은 빛으로 스며드는 꽃잎의 결은 봄꽃 특유의 가벼움보다는 오히려 중후한 기품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화엄매는 화사함만으로 사람을 끌어당기지 않는다. 오래 바라볼수록 깊이가 느껴지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진한 여운을 남긴다. 사진가들의 셔터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붉은 꽃송이가 한 화면 안에서 만나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놓칠 수 없는 장면이었다. 저마다 다른 화각으로 담아내지만 결국 모두가 같은 감탄에 머문다. 상춘객들의 표정 또한 인상적이었다. 두 손을 모은 채 한참을 올려다보는 어르신들, 그리고 스마트폰으로 연신 꽃을 담아내는 젊은 여행객들까지. 모두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봄을 맞이하고 있었다. 화엄매 앞에서는 나이도, 목적도 달랐지만 마음만은 하나였다. 이번 화엄사의 봄은 단순한 꽃구경이 아니었다. 절의 단아한 멋, 그리고 홍매화 특유의 깊고 검붉은 색감이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 같은 풍경을 완성했다. 눈으로 보고, 카메라에 담고, 마음속에도 오래 남는 풍경이었다. 붉다 못해 흑색으로 스며드는 화엄매의 빛은 올해 봄, 내가 만난 가장 깊은 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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