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재범의 나치 퍼포먼스에 대한 서사적 맥락에 대해

클리셰란 판단의 대상이 아니다.

김윤석 기자 | 기사입력 2011/07/02 [11:38]

임재범의 나치 퍼포먼스에 대한 서사적 맥락에 대해

클리셰란 판단의 대상이 아니다.

김윤석 기자 | 입력 : 2011/07/02 [11:38]
솔직히 필자로서는 이번 임재범의 퍼포먼스와 관련한 논란에 끼어들기가 상당히 부담스럽다. 다른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필자는 임재범이 나치 퍼포먼스를 하던 그 현장에 있지 않았다. 과연 직접 보지도 못한 퍼포먼스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한가?
 
필자가 진중권의 비평이 경솔했다고 여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퍼포먼스란 서사구조를 갖는다. 그것은 기표와 기의로 이루어지는 단순한 기호가 아니다. 각각의 기호는 서로 유기적 관계를 가지며 보다 복잡하고 심층적인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서사적 구조다. 그것을 단지 나치복장이라는 한 가지만으로 단정짓듯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를테면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스파르타쿠스>에서 자유를 위해 반란을 일으킨 검투사노예들은 끝내 로마군에 패해 전멸하고 만다. 그렇다고 그것을 단순히 노예들의 자유의지가 로마인의 무력에 패배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김기덕 감독의 <나쁜 남자>에서도 결국 자기가 사랑하는 여성을 타락시킬 수밖에 없는 남성의 이기심은 현실에 존재하는 무엇일 터였다. 영화는 여성을 대상화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현실에 존재하는 실제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전쟁중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를 비판하기 위해 누군가 일본군성노예의 복장을 하고 그 참혹함을 퍼포먼스로 구성해 보여준다. 그러면 단지 일본군성노예의 복장을 하고 퍼포먼스를 보였으니 여성에 대한 성적착취를 긍정했다거나 일본군성노예출신 여성들을 비하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아마도 미국의 흑인 앞에서는 과거의 노예제도를 연상케 하는 어떤 것도 보여서는 안 될 것이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펄프 픽션>은 그야말로 흑인을 조롱하는 영화일 터다.
 
필자도 아시아나의 "패러돔"이라는 노래에 대해 안다. 이 노래는 당시 냉전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에 한창 화두가 되었던 세계 제 3차세계대전을 모티브로 전쟁 이후의 암울한 세계를 묘사한 노래였다. 전쟁의 참상과 그리고 나치. 같은 나치라 할지라도 이 경우 기호적으로 다른 의미가 부여될 수 있다. 나치가 갖는 전체주의에 대한 동경과 그 반대인 전체주의에 대한 혐오.
 
필자가 논란 초기 클리셰는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한 것이 바로 그래서다. 반전의 메시지를 담은 노래를 부르며 보이는 나치 퍼포먼스는 사실상 하나의 클리셰처럼 빈번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드물지도 않게 행해지고 있던 것이었다. 나치에 반대하며 모든 자유를 억압하고 평화를 파괴하는 것들에 대해 반대한다. 나치 복장을 벗는 것은 그러한 자유와 평화의 의지에 대한 상징이다. 그것을 옳다 그르다 말하기에는 그렇게 표현해 온 전통이 있다. 그것이 곧 기호다.
 
그러면 물을 수 있겠다. 왜 하필 다른 것도 아니고 나치인가? 구일본제국군도 있을 수 있고 이탈리아군도 있을 수 있다. 북한군이거나 다른 침략전쟁을 묘사할 수도 있다. 그래서 기호인 것이다. 과연 자유와 평화를 이야기하고자 했을 때, 탈권위와 반문화, 반문명을 부르짖던 록의 정신에 비추어 그 대척점에 있는 가장 대표적인 대상이 무엇이겠는가?
 
나치가 아직까지도 문명세계에서 금기시되는 이유일 것이다. 나치란 정의였다. 그리고 증오였다. 더불어 자발적인 이성이었고 문명 그 자체였다. 봉건시대의 잔재마냥 천황의 이름 아래 맹목적으로 복종하던 구일본제국군과 차별되는 부분이었다. 차라리 지금의 대테러전쟁과 닮아 있다고나 할까? 최초로 적이 아닌 "악"과 싸운 전쟁이었다. 정의의 이름으로 그 악을 배제하고자 첨예한 이성에 의해 치러진 전쟁이기도 했다.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악을 배제할 것인가? 난징에서 보인 구일본제국군의 만행이 단지 본능에 이끌린 광기의 결과였다면, 아우슈비츠에서 저질러진 전쟁범죄는 냉철한 이성에 의해 저질러진 합리의 결과였다.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명령하는 권력이 아니다. 명령에 복종하는 자신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자기의 입장을 위해 전장으로 등을 떠미는 권력이 아닌, 그러한 권력에 자발적으로 동의하여 복종하는 일반의 대중이다. 스스로 수단이 되어 억압과 강제를 수용하며 기꺼이 도구가 되어 살인과 파괴를 저지르는 그런 그들 자신의 자유의지였다. 고도의 문명이 만들어낸 야만과 첨단의 문화가 이루어낸 몰인간화. 그에 반대하여 기존의 질서와 문명을 부정하며 나선 것이 히피였고 그것을 표출하던 것이 바로 록이었다. 과연 록의 공연에서 자유와 평화를 갈망하며 억압과 강제, 전쟁을 부정하고 비판하고자 한다면 그 수단으로써 무엇이 쓰여야겠는가.
 
그래서 클리셰를 가지고서는 판단할 수 없다 하는 것이다. 그러한 서사구조 안에 클리셰란 존재한다. 퍼포먼스에 대한 이해가 기호와 기호에 대한 유기적 이해에서 비롯되듯, 클리셰란 그것이 존재하게 된 서사적 맥락에 의해 이해되어야 한다. 어째서 나치이고 그러한 퍼포먼스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리고 퍼포먼스에 이은 임재범의 노래는 그것을 정당화시켜준다.
 
아니 원래 임재범의 콘서트 자체가 3부작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었다. 1부의 인간과 2부의 타락과 3부의 구원. 그래서 문제의 퍼포먼스가 있던 2부에서 악마와 지옥을 연상시키는 퍼포먼스가 이어지고 있었고 3부에서 임재범은 사제의 복장을 하고 무대에 오르고 있었다고 했다. 과연 전체적인 서사맥락에서 보더라도 악마와 지옥의 연장에 있는 나치란 나치를 찬양하고 미화하는 것일까?
 
물론 진중권의 비판도 이해할만한 부분이 있다. 과거 이승연의 "위안부 누드"가 비판받은 이유도 그것이었다. 과연 위안부 누드를 통해 일본군성노예에 대해 비판하고 경각심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냐? 아니면 단지 위안부 컨셉의 누드가 목적이냐? 이를테면 포르노물에서 성폭행범들이 아무리 가혹한 처벌을 받고 댓가를 치르더라도, 결국 포르노에서 성폭행장면이 등장하는 이유는 성폭행 자체를 대중의 흥미를 끌기 위해 이용하려는 데에 있다. 과연 나치의 복장을 하고 나타난 것이 나치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호기심을 이용하려는 것은 아닌가? 전체주의 국가답게 나치의 스타일은 상당히 사람들이 보기에 매력적인 부분이 있다.
 
바로 그런 점에서 비판의 여지는 있을 것이다. 한 마디로 진중권이 말한 그대로 너무 서툴렀다. 즉 촌스러웠다. 진정 나치를 비판하고자 했다면 보다 직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다른 수단도 있었을 것이다. 나치의 군복을 불태운다거나, 아니면 자리에서 찢고 내팽개친다거나. 하지만 그조차도 사실 지나치게 구시대적이며 요즘의 트랜드와는 맞지 않는다. 서툴렀고 그리고 낡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퍼포먼스 자체를 부정당하는 것은 문제일 것이다.
 
유럽에서는 그와 같은 나치에 대한 직접적 묘사 자체를 터부시한다. 하지만 여기에도 함정이 있다. 그 대신 간접적 묘사는 얼마든지 이루어진다. 더불어 개인적으로 나치를 소비하는 자체도 부정하지 않는다. 나치에 대한 이같은 클리셰 역시 미국과 유럽 문화권에서 처음 시작되었을 것이다. 나치는 유럽에서도 하나의 상징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나치와 관련한 것들은 금기시된다.
 
워낙에 전체주의적인 것을 혐오하는 진중권의 성향이 오버를 부르고, 어떻게 해서든 남의 흠집을 들추고 싶은 네티즌의 특성이 그에 부화뇌동한 결과라고나 할까? 진중권의 나치복장에 대한 혐오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에 대한 비판도 그의 성향에 비추어 인정할만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러한 퍼포먼스 자체를 죄로 여기고 단죄할 것인가.
 
전체주의에 대해 필자는 앞서 정의라고 단정했다. 그리고 증오라 했다. 하나의 정의 앞에 놓인 오답에 대한 증오. 그에 대한 어떤 이유도 변명도 필요치 않는다. 진중권의 비판은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이미 죄를 단정지으려는 일부 네티즌의 의도는 논란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임재범의 입장에 우호적인 모든 의견을 실드라 여기며 거부하려는데? 불관용에 대한 관용은 없다고 하지만 과연 나치를 퍼포먼스에 인용한 자체가 불관용이며 불관용의 대상인가? 과연 개인의 의도가 담긴 퍼포먼스가 그 한 부분의 기호적 의미에 의해 단죄되어야 하는가?
 
단지 서툴렀고 촌스러웠다. 그러나 그 의도 자체는 이해할만한 부분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옳은 것이지 그 자체로써 한 인간을 단정짓고 단죄하려는 것은 오만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그것이 퍼포먼스의 전체 맥락이 아닌 부분에 대한 비판이고 비난이었다면. 나치복장 하나가 그동안의 모든 퍼포먼스를 정의해 버린다.
 
기호란 기표와 기의다. 퍼포먼스 역시 마찬가지다. 그 의도가 있을 터다. 그 의도가 드러났을 때 얼마나 적합한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전달되는가? 그런데 단지 어떤 표현이 쓰였는가? 무엇이 쓰였는가? 진중권에 실망하며 네티즌을 다시 한 번 확인한 계기였다. 과연 그렇게밖에는 할 수 없었는가.
 
물론 말했듯 필자 역시 돌아다니는 동영상과 실제 공연을 관람한 관객의 이야기를 보고 듣고 모아 판단하는 것이 전부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직접 보지도 못했고 전부도 아니다. 그러나 말은 너무 쉽다. 그 점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다. 무리다. 어리석다. 안타까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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