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은회

허익구 논설주간 | 기사입력 2020/01/09 [13:40]

사은회

허익구 논설주간 | 입력 : 2020/01/09 [13:40]

 

▲ ©허익구(논설주간)

 

  

 

                                     

                           

                         제목 : 사 은 회

                                                                                                허 익 구(논설주간)

  “선생님 저에게 했던 말 기억 하세요?”

직장을 가지고 늦깎이로 야간 대학을 다니는 그 여학생은 감춰두었던 섭섭한 마음을 확인하겠다는 듯 말을 꺼냈다.

  “글쎄, 내가 무슨 말을 했지? 전혀 기억이 없는데ㆍㆍㆍ

  “그럼 됐습니다.”

직감으로 내가 한 말에 상처를 받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몇 번이나 무슨 말을 했느냐고 물었지만 그 학생은 끝까지 말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학생에게 상처를 줄 만한 이야기를 한 기억이 없다. 자리가 끝난 이후에 다시 물어 보았지만

  “괜찮습니다. 선생님께서 마음에 두고 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이해한다는 말에 한결 마음이 놓이긴 했지만 그동안 얼마나 상처를 받았으면 사은회를 하는 자리에서 뜬금없는 말을 했을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마음을 아프게 했다면 미안 하구나사과를 하자 가슴에 묻어둔 아픈 상처가 씻어진 듯 더욱 환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졸업을 하기 전에 맺힌 응어리를 풀어내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에 용기를 얻어 이야기를 한 모양이었다. 말도 못한 채 떠나버렸다면 오해를 풀 기회조차 없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그 학생이 용기를 내어 준 것이 얼마나 고맙고 다행스런 일인지 모르겠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이다. 담임 선생님께서 무심코 던진 말이 사금파리에 베이는 듯 가슴을 아프게 했던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도둑놈은 이 중에 있다.”

나를 포함하여 영문도 모르고 불려 나간 다섯 명을 가리키며 선생님의 무서운 추달이 시작 되었다. 학급비를 걷은 돈 30원이 없어진 것이다. 가끔씩 분실사건이 있었고 그때마다 모든 친구들이 손바닥을 맞는 단체 벌을 받아야 했다. 그날은 손바닥이 아니었다. 모두들 책상위에 올라가서 종아리를 걷게 했다. 꼰들꼰들한 작은 책상은 아이들이 서있기에도 불안했다. 뒷줄부터 매서운 매질이 시작되었다. 울먹이는 아이와 책상에서 떨어지는 아이들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맨 앞줄에서 항상 귀여움을 독차지 했던 한 여자 친구는 무서움에 떨며 금방이라도 넘어 질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선생님의 회초리는 모르는 척 그 애를 지나치고 있었다. 다른 네 명의 친구들과 교단 위에서 이를 지켜본 나는 아니라고 하기 보다는 당연한 듯 느껴졌다. 모든 것은 선생님의 처분에 달린 것일 뿐, 아이들의 생각이나 주장은 있을 수 없었다. 아니라고 말해야 할 때 아니라고 말 할 수 있는 자는 오로지 가혹한 매질이 따를 뿐이었다. 감히 그림자도 밟아서는 안 된다는 선생님께 대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옳고 그름도 선생님의 결정에 달린 것이었으니 아무도 그 일을 말하는 아이는 없었다

 

  불려나간 다섯 명에게도 매질이 시작되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똑같이 세대를 맞는 것이 아니라 한대씩 더 맞은 회초리 끝은 종아리를 파고드는 듯 따갑고 마음의 상처만큼이나 어린 나를 아프게 했다.

  “지난번 돈은 네가 가져갔지

철수를 가리키는 선생님의 손가락과 안경너머의 매서운 눈초리에 우리는 무서워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제가 안 가지고 갔습니다. 증거를 대십시오 증거를

씩씩거리며 철수가 말했다.

  이제까지 어느 누구도 선생님에게 반기를 들고 말한 아이는 없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안경과 시계를 벗고 양쪽 따귀를 번갈아 가며 때렸지만 철수는 울면서 대항을 했다. 끝까지 물러서지 않는 철수에게 지쳐버린 선생님은 오히려 주눅이 들었는지 다시 시계와 안경을 착용하면서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철수 덕분에 불려나간 나머지 네 친구들은 더 이상 문초를 받지 않았다. 자리에 앉았어도 모두가 나를 쳐다보는 느낌이었다. 많은 친구들의 눈초리는 철수의 용감성 보다 절대권위의 선생님 말씀에 대항하는 철수와, 절대자의 손끝으로 지명한 나머지 네 명도 나쁜 아이로 보는 것 같았다. 학교가 파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나 혼자였다. 언제나 등·하교를 같이 했던 짝꿍도 그날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학교에서 일어난 일을 집에서는 알 리가 없었다. 선생님께 맞은 것을 부모님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잘못했으니까 선생님이 꾸지람 하셨겠지ㆍㆍㆍ너무나 뻔한 대답이 돌아온다는 것과 설령 수긍한다고 해도 농사일을 접어두고 학교에 찾아가 항의를 할 부모님들이 아니기 때문임을 알고 있었다. 단지 아니라고 마음속으로만 수없이 외쳐대며 터뜨릴 수 없는 억울함을 스스로 달랬다. 아이들에게는 항변이나 불평할 권리 같은 것은 애초에 없었다.

 

  나는 교단에 서면서 몇 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어렸을 적 기억이 떠오르면 마음속으로 한없이 울었다. 그 사건의 선생님은 내 마음속에 남은 검게 칠해진 그림자를 지울 기회도 없이 오래전에 작고하셨다. 어쩌면 그런 사건이 있었는지 조차 모르고 떠나셨을 것이다. 서운함보다는 절대권위속의 주·종 같았던 교육풍토 속에 묻혀버린 어린 꿈들의 안타까움으로 내 눈시울이 붉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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