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해봉사(己亥封事)에 나타난 초려선생의 개혁 사상

김시몬 기자 | 기사입력 2024/02/02 [17:15]

기해봉사(己亥封事)에 나타난 초려선생의 개혁 사상

김시몬 기자 | 입력 : 2024/02/02 [17:15]

 

 

                                                              이태구(초려역사공원 한문학 강사)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 선생(1607~1684)은 선조 40년(1607년)에 충남 금산에서 5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부친은 경주(慶州) 이씨 유학(幼學) 이서(李曙)이고 어머니는 청풍(淸風) 김씨이다.

 

선생은 8세에 이미, 즉석에서 율시(律詩)를 지을 수 있을 만큼 조숙하고 매우 총명하였다고 한다.

 

15세에 진잠(鎭岑)의 민재문(閔在汶)에게 배웠고 이후 연산(連山)의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는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연원(淵源)에 접한 것이며 이어 사계의 아들인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에게 수학하였다.

 

사계 문하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 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 시남(市南) 유계(俞棨) 등을 일컬어 '충청오현(忠淸五賢)'이라 칭하기도 한다.

 

선생은 예학의 태두(泰斗) 사계의 문인으로서 예학에 조예가 깊고 선비로서 출처(出處)의 도에 밝았으며 효종, 현종, 숙종 등 3대에 걸친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산림(山林)이며 경세사상가(經世思想家)로 매우 명망이 높았다.

 

비록 출사(出仕)하지 않았으나 늘 현실을 중심으로 당면한 국정 현안(懸案)을 파악하여 이를 해결하고 대처할 수 있는 경륜(經綸)과 학덕(學德)을 겸비하고 있었다.

 

특히, 임병양란 이후 민생(民生)을 바탕으로 한 국정 혁신 대 개혁안으로 대표되는 초려의 기해봉사(己亥封事)는 변화와 혁신이 그 핵심이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중기는 조선 건국 이후 왜란(倭亂)과 호란(胡亂)이라는 양대 전란이 발생하여 국가적으로 절체절명의 위태로운 시기였는데 효종(孝宗)은 조선의 군왕 중에서 유일하게 사대주의를 벗어나 청나라에 인질로 있을 때부터 북벌(北伐)계획을 모색한 인물이었다.

 

선생은 스승인 신독재 선생과 송시열, 송준길 등과 함께 두 차례 효종의 밀지(密旨)를 받고 북벌론(北伐論)의 대의(大義)를 뒷받침할 계책과 방략(方略)을 강구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 북벌계획은 당시 조정에서 친청파(親淸派)가 득세하여 반대한 데다가 기득권층인 사대부들의 실질적인 참여가 미흡하였으며 국제관계에서도 명(明)이 청(淸)나라에 멸망한 후 1659년 효종의 승하와 더불어 무산되고 말았다.

 

자신의 도(道)가 행해질 만하면 나가고 그렇지 않으면 물러나는 것이 선비의 출처지도(出處之道)이다.

 

선생은 효종에게 올릴 종합적인 국정 대 개혁안을 체계화하여 완성하였고 여러 사정 때문에 현종 조에 제진(製進)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조선조 최고의 상소문인 기해봉사이다.

 

효종의 북벌계획 실현을 위한 대비책으로서 2만여 자에 달하는 당시 국정 전반에 걸친 정치 개혁안과 2만여 자의 세부시행 부록을 담은 최고, 최대의 실질적인 대 상소문이었다.

 

율곡 이이(李珥)의 만언봉사(萬言封事)를 기초로 하여 왜란(倭亂)과 호란(胡亂) 이후 피폐해진 조선왕조 체제를 재건할 수 있는 현실적인 개혁 사상을 종합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기해봉사는 국정 개혁과 혁신을 주창한 그의 정치적 업적을 대표하는 역작으로 국가 발전과 민생 안정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녹아 있다.

 

기해봉사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생은 먼저 칠폐(七弊)를 언급하였다.

 

첫째, 윗사람은 다스림을 갈구하는 실공(實功)이 없고[上無求治之實], 아랫사람은 일을 책임지는 실공이 없으며[下無任事之實], 경연(經筵)은 도를 강론하는 실공이 없고[經筵無講道之實], 학교는 선비를 양성하는 실공이 없고[學校無造士之實], 여러 방책들은 백성을 구제하는 실공이 없으며[群策無救民之實], 사람들의 마음은 선을 향하는 실공이 없고[人心無向善之實], 조정(朝廷)은 가르치고 명령하는 실공이 없다[朝廷無敎令之實] 고 지적했다.

 

유학(儒學)은 왕도정치(王道政治)의 혜택을 실제로 입는 왕도정치의 실효(實效)와 공효(功效)를 중시했는데 선생은 당시 왕도정치의 실상이 없는 형세를 비판하면서 기강이 무너지고 민생이 곤궁한 것도 바로 고질화된 칠폐에서 연유한다고 분석했다.

 

다음은 국정 개혁의 주요 요목(要目)으로 제시된 3강령(綱領) 16조목(條目)은 먼저, 풍속을 바르게 함[正風俗]으로 향약(鄕約)의 시행, 오가통(五家統)의 시행, 사창(社倉)의 운영을 제창하였고 그리고 세상의 인재를 널리 구하고 양성함[養人才] 으로 학교(學校), 연영원(延英院), 과거법(科擧法), 오위(五衛), 군자별창(軍資別倉)의 시행과 개혁을 역설했다.

 

마지막으로 옛 폐단을 혁파해야 함[革舊弊]을 강조했는데 이는 내수사(內需司),공안(貢案), 부세(賦稅), 인역(人役), 양전(量田), 태용관(汰冗官), 구임(久任), 금치습(禁侈習)을 지적하였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풍속을 바르게 함[正風俗]' 부분에서는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참조해 시의(時宜)에 맞게 향약을 시행하여 향촌을 조직하고 오가통(五家統)제를 실시해 백성들을 조직화하는데, 좋은 풍속은 나누고 나쁜 습속을 경계하게 하여 향약과 서로 표리가 되도록 꾀하였다.

 

이는 뒤에 호구를 파악해 수세(收稅)와 부역(賦役)의 기초자료를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사창(社倉)을 설치해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게 하고 저축 증대를 돕게 하니 이것이 '풍속을 바르게 하고 저축을 넓게 하는 도구'가 된다고 간파하였다.

 

'인재를 양성함[養人才]' 부분에서는 사람이 태어나 10세가 되면 무릇 백성들은 귀천(貴賤)을 막론하고 모두 숙학(塾學)에 입학시키며 15세가 되면 우수한 사람을 선발하여 사학(四學)이나 향교(鄕校)로 진학시키고 그 나머지는 모두 오위(五衛)에 소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오위는 귀한 자와 천한 자[貴賤]를 함께 소속시키되 기록을 다르게 하면 귀천의 구별이 없는 폐단이 없어서 병역도 균등하게 감당할 수 있다고 하였다.

 

문무겸전의 인재를 뽑는 과거제(科擧制)와 현자에게 기회를 주는 연영원(延英院)을 활용하면 벼슬과 학문이 함께 진보하여 모두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인재로 널리 쓸 수 있다고 보았다.

 

이렇게 되면 나라에는 무의도식 하는 무리가 없어질 것이요, 밭과 들에는 농사짓는 백성이 많아질 것이니 이것이 '인재(人才)를 기르고 재용(財用)을 절약하는 방법'이라고 하였다.

 

'옛 폐단을 혁파함[革舊弊]' 부분에서는 내수사(內需司)를 혁파하여 군자별창(軍資別倉)으로 보내어 내실 있고 공정하게 관리하며 염분(鹽盆), 어살(魚箭), 선세(船稅)는 모두 군자별창(軍資別倉)으로 들여서 한 물건이라도 사사로이 씀이 없게 하여 국고에 환수되어 공적(公的)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하였다.

 

궁장(宮庄)과 충훈부(忠勳府)의 특혜 철폐, 부세(賦稅) 및 인역(人役)제를 개혁해 양반자제의 병역부과 등을 강력하게 주창했는데 이는 지배계층의 부당한 특혜를 타파하여 병력지원을 확대하는 계책이었으며 공안(貢案) 조정과 정기적인 양전(量田) 시행으로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줄이고 국력 신장을 위한 실질적인 정책이었다.

 

위로는 궁가(宮家)로부터 아래로는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사치의 풍습은 기강과 한도가 없어서 온갖 폐단이 다 여기에서 유래한다고 통탄하면서 필히 위로부터 뼈아픈 실행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이것이 '구폐(舊弊)를 개혁하고 옛 법[故章]을 회복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하였다.

 

성군론(聖君論)은 율곡 이이의 성학집요(聖學輯要)를 토대로 군주가 갖추어야 할 위정(爲政)의 덕목을 논한 것으로 수기(修己)와 제가(齊家)로 구성된다.

 

'위학위치지법'(爲學爲治之法)은 군주로서 학문을 연마하고 정치하는 요법으로 먼저, 자신의 수양을 으뜸으로[修己] 보았다.

 

입지(立志), 수렴(收斂), 궁리(窮理), 성실(誠實), 양기(養氣), 정심(正心), 검신(儉身)이 그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집안을 정돈[齊家]해야함을 지적했는데 정윤리(正倫理), 은독의(篤恩義)가 그것이다.

 

수기(修己)의 항목을 보면 군주는 뜻을 바르게 세워 천하를 크게 다스려야 하며 군주 스스로 정제엄숙의 자세로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인의를 행하며 교만한 기질을 바로잡고 참된 기운을 길러 군주로서 마음을 바로잡고 몸소 절검(節儉)을 숭상하라는 내용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제가(齊家)의 항목을 보면 군주가 몸소 법도를 지켜 크게 윤리를 바로 잡고 은의(恩義)를 두텁게 하며 특히, 궁궐 내에서 절검을 숭상하여 만인의 표본이 될 때 민심이 안정되고 나라가 평안해진다는 내용을 제시하였다.

 

백성들이 어진 본성을 행할 수 있는 항산(恒産)이 있고 원망이 없는 사회에서 살 수 있게 해야 하는데 실공(實功)이 없다면 백성들은 믿고 따르지 않을 것이니 군주가 이 법을 행하고자 한다면 '수기치인'(修己治人)의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제세안민'(濟世安民)의 정치의 요체(要諦)가 군주의 일심(一心)에 있다고 결론지은 것이다.

 

결국, 개혁의 성패는 군주에게 달려 있다고 설파하여 통렬한 반성을 요구한 것이다.

 

오늘날 정치가들이 추구해야 할 태도에 대해 큰 울림을 준다고 하겠다.

 

그러면 초려의 개혁 사상이 현대에도 유효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드러났듯이 강령과 항목별로 조선조 중기 이후에 장기에 걸쳐 수많은 검토와 심의를 거쳤지만 국가를 위한 계책으로 채택되지는 못하였다.

 

이는 국제 정세와 관련하여 다수의 강화파(講和派)나 친청파(親淸派) 등 반대 세력에게 수용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게다가 기해봉사가 혁신적이고 진보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보니 예송(禮訟) 문제 등을 거치면서 현실에 안주하려는 왕과 기득권 사대부들의 저항에 직면하였으며 결국, 보수적인 세력들이 개혁안을 거부하였다.

 

조선조는 후기로 가면서 그 폐단이 쌓이면서 삼정의 문란과 민심의 동요 그리고 당파 분열로 인해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종합적 개혁안이 뜻이 있는 학자에게는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실학사상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으며 조선 후기 이후에 학문적 지평을 넓혔음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기해봉사에 언급한 이 폐단들은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작금의 여당이든 야당이든 정치인들이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고 하면서 실제, 당리당략에 치우쳐 입으로만 외치는지, 일터에서나 집에서 각자의 일에 대해 책임지려 하는지, 학교에서는 학생의 인격도야를 위해 교육하는지, 사람들의 마음이 붕 떠서 사람을 위한 배려는 없고 저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데에만 올인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할 일이다.

 

선생의 국정 개혁안은 현대 사회의 정치 지도자가 그 도덕성을 얼마나 겸비해야 하는지 크게 경종을 울려주고 있음이 사실이다.

 

만연하는 물질만능주의, 이기주의를 타파하고 풍속을 바로잡아 진정한 휴머니즘을 찾으라고 질책하고 있다.

 

초려의 사상과 정신은 오늘의 대한민국 미래 100년의 시대정신이 아닐 수 없다.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네트워크배너
서울 인천 대구 울산 강원 경남 전남 충북 경기 부산 광주 대전 경북 전북 제주 충남 세종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