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이 군중의 화풀이 대상으로 전락하나?

<뉴욕칼럼> 노자가 본 나영이 사건

채수경 | 기사입력 2009/10/07 [12:12]

법이 군중의 화풀이 대상으로 전락하나?

<뉴욕칼럼> 노자가 본 나영이 사건

채수경 | 입력 : 2009/10/07 [12:12]
사물의 인식은 이름 붙이기로부터 시작된다. 오래 전에 그걸 깨달은 노자도 도덕경(道德經) 첫머리를 “도가 도일 수 있지만 늘 그러한 도는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이름을 이름붙일 수 있지만 늘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건 아니다(名可名 非常名). 이름 없음은 천지의 처음이고(無名天地之始) 이름 있음이 만물의 어미다(有名萬物之母)”라고 시작했었다.

이름 명(名)은 저녁 석(夕) 아래 입 구(口)가 붙은 것으로서 사물을 분간하기 어려운 저녁에 타인에게 ‘나’를 인식시키기 위해 ‘나’의 입으로 말하는 것, 이름=존재여서 이름 붙이기를 보면 그 사람의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의 수준이 한 눈에 드러난다. 지능이 낮은 유아나 문명권에 진입하지 못한 사람들일수록 자기중심적인 것은 물론 사물의 의미를 덜 깨우친 사람들이 붙인 이름은 금방 소멸된다.
 
사물의 핵심보다는 그걸 인식할 때의 일시적인 느낌을 더 중시하는 한국인들의 이름 붙이기야말로 엉성하기 짝이 없다. 단적인 예가 ‘신종 플루’다. 원인체가 돼지(swine)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여서 다른 나라사람들은 ‘스와인 플루(swine flu)’라고 부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람들만 축산업계의 반발을 고려하여 ‘신종(新種) 플루’라고 바꿔 부르고 있지만 “이 다음에 소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원인인 플루가 발생할 경우엔 ‘신신종(新新種) 플루’, 말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원인인 플루가 발생할 경우엔 ‘신신신종(新新新種) 플루’라고 명명할 거냐?”고 비웃으면 대꾸할 말이 적절치 않다. 그거야 말로 웃기는 비상명(非常名)의 샘플, 몇 해 전 ‘조류독감’이 확산됐을 때 ‘독감’이라는 말의 어감이 흉측하여 양계장들이 피해를 입는답시고 ‘조류 인플루엔자’로 바꿔 불렀던 것과 비교해 봐도 일관성이 없어 닭과 오리들이 “왜 돼지만 빼주고 우린 안 빼주느냐?”고 부리를 삐죽일 것 같다.
 
최근 아동 대상 성범죄가 기승을 부려 전 국민의 공분을 사고 있는 가운데 그런 류의 사건을 ‘아동 대상 성범죄’라고 명확하게 이름 짓지 않고 범죄의 주체를 아동으로 오인하기 쉬운 ‘아동 성범죄’라고 부르는 것도 못 마땅하지만 피해자 중심의 ‘나영이 사건’을 가해자 중심의 ‘조두순 사건’이라고 이름 바꾼 것이야말로 뭐든지 자의적으로 이름 붙이는 한국인들의 비상명(非常名) 생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나영이 사건’은 금년 57세의 조두순이 등교 중이던 여덟 살 여자 어린이 나영이(가명)를 인근 교회 화장실로 끌고 가 성폭행한 후 증거를 인멸한답시고 성기와 항문 등을 훼손한 사건으로서, 일각에서 “나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수많은 여자 어린이들에게 수치심을 안겨줄 수 있다”고 지적하자 지금껏 ‘나영이 사건’이라고 나발을 불어대던 언론들까지 잽싸게 태도를 바꿔 “앞으로는 ‘조두순 사건’이라고 부르겠다”고 침 튀기고 있으나, 이제 와서 ‘조두순 사건’이라고 바꿔 부르면 조두순이 저지른 사건들 중 어느 것을 특정하는 것인지 불명확해질 뿐만 아니라 나영이의 경우와 똑 같이 조두순이라는 이름을 가진 다른 수많은 사람들에게 수치심을 안겨주는 우를 범하게 된다는 것을 몰라 피식 웃음이 절로 나온다. 자기네들이 사건의 이름을 잘못 붙여놓고 그 부작용에 대한 책임까지 조두순에게 덮어씌우는 것 같다. 처음부터 ‘나영이’라는 이름을 쓰지 말든가 아니면 범죄 발생지 이름을 따서 ‘안산 여자 어린이 성폭행 사건’이라고 명명했어야 옳았다.

이름 붙이는 게 만물의 어미 즉 사물 인식과 대응의 출발점이라는 노자의 충고를 흘려듣지 말기 바란다. 화가 나도 참고 이름을 올바르게 붙이자. ‘나영이 사건’을 ‘조두순 사건’이라고 바꿔 부른다면 조두순의 신상을 낱낱이 까발리는 것도 재고해봐야 한다. 조두순과는 무관한 조두순 부모와 자식들의 수치심과 인권 또한 생각해줘야 하거니와 인민 재판하듯 분위기에 들 뜬 나머지 이미 대법원에서 징역 12년의 형이 확정된 조두순에게 화학적 거세형을 추가하자고 떠들어대다 보면 법이 군중의 화풀이 장난감으로 전락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조두순의 극악무도한 범죄를 응징하는 데만 열 올릴 게 아니라 그런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데 더 힘쓰기 바란다.   <채수경 / 뉴욕거주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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