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부산여성을 만나다, 양성평등한 삶 한눈에!

부산여성사 사진전, 제3회 양성평등 사진전

시사우리신문편집국 | 기사입력 2009/11/08 [16:40]

역사속의 부산여성을 만나다, 양성평등한 삶 한눈에!

부산여성사 사진전, 제3회 양성평등 사진전

시사우리신문편집국 | 입력 : 2009/11/08 [16:40]

부산시는 근․현대 부산여성들의 삶을 조명하여 지역 여성의 정체성 확립에 기여하고 부산여성의 미래 시사점 도출과 부산여성으로서의 긍지를 심어주는 계기를 만들기 위한 「부산여성사 사진전」과 양성평등문화 확산을 위한 「제3회 양성평등 사진전」을 개최한다고 밝혔다.

 



사진전 전시작품 중 여성사 사진은 부산의 여성독립운동 박차정, 복지 양한나, 정치 박순천, 문학 김말봉 등 인물사진 11점과 자갈치시장, 신발공장, 조선방직 등 60~70년대 부산을 상징하는 사진 9점 등 총 20점이며, 양성평등 사진은 8월 20일부터 10월 20일까지 공모하여 총 263점 응모(일반 201, 학생 62)한 작품중 엄선한 40점이다.

 

전시는 11월 5일부터 11월 10일까지 시청 지하철 통로에서 전시하며 이후 여성가족개발원(2층 갤러리)에서 계속 전시한며, 양성평등 사진전에 공모하여 입상한 수상자는 11월 5일(목) 오후 3시에 여성가족개발원에서 일반부문과 학생부문으로 나누어 수상한다.

 

상기 사진전은 부산여성가족개발원(원장 전상수)에서 공모와 부산여성사 사료 연구를 통하여 작품선정 및 자료를 발굴하였으며, 부산시 사진전을 통하여 양성평등과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고 역사 속의 부산여성의 삶을 재조명하여 여성의 긍지를 심어주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인물 설명> 총 11명

 

□ 박차정(1910-1944)

- 투철한 민족의식을 소유한 독립운동가

 

일찍이 교육의 성차별 철폐와 여성의 보편교육 확장 등을 주장하며 국내외에서 활약하는 가운데 여성과 민족 해방운동을 접목하는데 노력했다. 이데올로기 대립 속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다가 해방 50주년을 맞아 건국훈장독립장을 받았다. 이론가와 실천가로서 민족해방운동과 여성해방운동을 주도했던 인물로 민족해방운동사상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 양한나(1893-1976)

- 독립운동가에서 여성의 대모로

 

기독교여성교육의 선구자이자 독립운동가. 여성의 민족정신을 일깨우며 여성교육의 산실이 된 부산여자청년회 설립, 부산여자기독청년회의 여성계몽운동, 자매여숙 설립을 통해 소외여성과 고아를 위해 헌신했다. 상해임정초대의원, 초대 수도여자경찰서장, 한국애국부인회 부위원장 역임, 1967년 용신봉사상, 1976년 국민훈장 동백장 등을 받았다

 

□ 박순천(1898-1983)

-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한 여성정치가

 

최초 야당당수로서 정치력을 발휘하여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회복하기 위해 여성구국운동을 펼친 여성정치가. 2대 국회에서 이승만 독재권력에 맞서는 한편, 여성의 인권신장을 위한 입법활동에도 힘을 기울였다. 여성노동자에게 생리유급휴가와 산전후 60일 유급휴가를 허용하는 모성보호법을 통과시키고, 간통쌍벌죄를 주장하여 이를 법제화하는데 기여했다.

 

□ 김말봉(1901-1961)

- 악인은 있을지라도 악한 여자는 없다

 

문학작품을 통해 언제나 대중에게 다가서려고 했으며「망명녀」를 시작으로「밀림」,「찔레꽃」,「화려한 지옥」등을 발표했다. 그녀의 작품은 자신의 인생과 문학을 부산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활동함으로써 폭넓은 내용과 배경을 보여준다. 사재를 털어 박애원을 설립하여 운영할만큼 성매매 여성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 정봉금(1905-1988)

- 여성운동과 교육의 등불

 

해방 후 초창기 부산여성운동의 리더이자 부산 최초의 여의사. 여성의 지위향상과 남녀평등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여성교육이 절실함을 깨닫고, 뜻있는 십여명의 부산 여성들과 함께 가난으로 인해 학업을 포기하는 여학생들을 위해 <부산부녀장학회>를 설립하여 여성인재발굴을 위한 교육장학사업에 헌신했다. 초대이사장에 선임되어 2대, 3대 이사장을 지냈다.

 

□ 안음전(1905-1985)

- 고아들의 ‘그리운 어머니’

 

고아들을 보고 그냥 발길을 돌리지 못해 부산역을 다니며 고아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 부산 최초의 아동양육시설인 ‘새들원’을 설립했다. 국민훈장 동백장과 아산사회복지대상을 수상했다. 해방이후 혼란스러웠던 한국 역사 속에서 사회의 약자들을 위해 헌신했던 안음전은 그녀의 품을 거쳐 간 수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여전히 살아있는 ‘그리운 어머니’로 남아 있다.

 

□ 허무인(1908-1976)

- 여성운동과 정치활동의 선봉자

 

1973년 부산 최초 국회의원으로 부산 여성의 정치활동에 시작을 알렸다. 1954년부터 부산시의원과 <대한부인회부산지부> 회장을 겸직하면서 정치활동과 여성운동을 병행했다. <대한부인회>와 <여성저축생활 부산지> 회장 재임 동안 생활합리화운동ㆍ저축장려운동ㆍ혼분식장려운동을 주도했다. 여성운동 과도기에 여권지위향상에 힘씀으로써 사회의 귀감이 되었다

 

□ 이동희(1917-1978)

- 꽃동산의 일꾼

 

한국 최초의 공립유치원인 부산유치원의 원장. 해방 전후 어려운 아동교육의 상황 속에서도 유치원 교육의 한 길을 걸어온 부산의 여성 교육자였다. 평생을 독신으로 유아교육에 헌신했던 그녀의 삶은 어린이들을 위한 꽃동산에서 물주고 꽃 기르는 최고의 일꾼이었다.

 

□ 김혜성(1920-1988)

- 영원한 프리마 발레리나

 

부산에 문화예술 파급 및 문화계 발전에 공로를 세운 무용가. 1960년 41세의 가정주부로 제일극장에서 열린 부산 최초의 발레단 <푸리마 발레단>의 창립공연에서 프리마 발레리나이자 발레단 단장으로 무대에 올랐다. 부산시 문화위원, PTP회장, 국제부인회 회장, BPW(전문직여성한국연맹) 8대 회장으로 국제문화교육 및 지역여성들의 의식개혁을 위해 노력했다.

 

□ 황순조(1922-1985)

- 늘 깨어 있는 여성

 

부산의 첫 여성장학사 및 여성교장. 해방이후 획일적인 군사교육문화 속에서 현실적인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강조, 교육현장에서 실천했다. 1971년 여성교육세미나에서 “미래를 내다보고 내일에 맞은 교육을 해야 한다. 과거에는 여자는 가무처리법이나 잘 배워서 가정주부로서 잘 살면 된다고 했지만, 앞으로의 여성교육은 그렇게만 가르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 김천옥(1933-1990)

- 석류와 화석에 새긴 집념의 화가

 

1948년 제1회 부산미술전람회에서 김천옥이란 이름의 여학생이 16세의 나이로 당당히 입선했다. 이듬해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도 연달아 입선하는 이변을 일으켰다. 화려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부산 화단에 첫 발을 내딛은 김천옥은 1960년대 초반까지 부산의 대표적인 모더니스트 중의 한 명으로 손꼽히는 집념의 여성 화가였다

 

<부산을 상징하는 사진 설명> 총 9점

 

□ 김천옥 화가 작품 (조 영 소장)

 

1980년대 자신의 여성성을 발견, 집중했던 모티프 ‘석류와 화석’. 반추상․ 추상을 넘나들며 석류시리즈에 집중했다. 전통적으로 여성의 과일로서 다산과 생명력의 과일인 석류 속살에 박힌 알갱이들을 그리며 자신의 인생과 여인의 한을 새겨 넣었다. 석류와 화석은 “지금까지 생존해오게 한 뼈의 살을 한 덩어리로 소화”시키는 집념과 인내의 표상으로서 그녀 안에 “깊고 밀도 있는 그리고 빛나는 향기를 풍기는” 존재들이다

 

□ 동래부순절도 (육군박물관 소장)

 

선조 25년(1592년) 4월 15일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에서 왜군의 침략에 대응하다 순절한 송상현과 군민들의 항전 내용을 묘사한 민족적 교훈을 담은 그림. 1760년의 동래부순절도에 두 여성의 행적을 형상화했으며 1766년에는 단을 개축하여 이들을 기리는 제사를 지냄으로써 이들의 행적은 널리 전승될 수 있었고, 전쟁에서 절의를 지킨 여성으로 기억되고 있다.

 

□ 1970년대 신발공장 I, II (부산광역시 소장)

 

1970년대 부산의 대표적인 주종산업인 신발제조의 모습이다. 1960-70년대 부산지역 경제에 큰 역할을 담당했던 신발산업은 특성상 생고무를 추출하여 식기 전에 작업이 진행되어야 하므로 기계를 24시간 가동해야 하는 업종으로서 대부분의 마무리 작업은 사람이 일일이 손으로 만들어야 했다. 이러한 수작업은 여성 산업역군들의 몫이었다

 

□ 1960년대 중반 조선방직 (부산진구청 소장)

 

1960-70년대 전성기를 맞은 부산은 조선업을 비롯, 섬유와 신발산업의 메카로 성장했다. 이 산업들은 일제 강점기때부터 발전의 잠재성을 지니고 있었는데 섬유는 조선방직으로, 신발은 동양고무, 태화고무, 진양고무의 3두 마차로 출발했으며, 섬유업이 대구로 옮겨가기 전 1930년대부터 조선방직, 대선양조, 삼화고무가 있던 부산진 공업지대가 번성했다

 

□ 자갈치 시장 (국가기록원 소장, 최민식 作)

 

부산시에서는 관광산업을 위해 부산을 대표할 수 있는 상징물로서 부산 여성을 상징하는 자갈치아지매를 선정했다. 부산의 명물인 자갈치시장은 오늘날까지도 “자갈치아지매”를 중심으로 그 생명을 이어가고 있으며 자갈치시장은 부산을, 자갈치아지매는 부산 여성을 대표적으로 상징하고 있다.

 

□ 자갈치 아지매 (국가기록원 소장, 최민식 作)

 

자갈치시장에서 수산물을 거래하던 여성노동자들을 통칭 “자갈치아지매”라고 불렀다. “자갈치아지매”라고 한 것은 거래물품이 수산물이고, ‘자갈치’가 주는 뉘앙스 역시 생선의 이름과 비슷하기 때문인 듯하다. “자갈치아지매”는 억센 경상도 사투리로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 억척같이 살아온 여성상인을 지칭하는 가장 적절하고도 친근한 호칭이다.

 

□ 부산진시장 (김동철 소장)

 

1770년에 편찬된『동국문헌비고』(영조46)에 의하면 부산진 성서문 밖의 미곡과 건어물 집산지에서 4일과 9일장을 열었다고 한다. 이곳이 현재 부산진시장으로서 본래 명칭은 ‘산진시장’이며 조선시대 이곳에 있었던 부산진성으로부터 연유된 이름이다. 산전시장은 동래지역의 5일장 체계에 속해 있었던 부산장에서 비롯되었으며, 대구장 다음으로 영남에서 두 번째로 큰 시장이었다.

 

□ 어시장 (김동철 소장)

 

용미산 방향에서 촬영한 어시장 모습이다. 어시장 앞에는 생선을 잡아온 배들이 정박해 있고, 멀리 영도와 대풍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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