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증언록]반란의 도시 출판에 부쳐

광주사태의 진실을 재조명하며

김동문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12/11/30 [14:52]

[역사증언록]반란의 도시 출판에 부쳐

광주사태의 진실을 재조명하며

김동문 논설위원 | 입력 : 2012/11/30 [14:52]
'반란의 도시'출판에 부쳐

자랑스러운 광주를 위해 자유대한을 사랑하는 정론직필의 언론인 김동문 선생이 붓을 들어 ‘5,18 광주사태’의 체험 수기를 책으로 엮어 세상에 반포하는 것은 우선 진천동지(振天動地)할 용기 있는 행동으로 찬사를 보낸다.

필자는 왜, 선생의 글에 ‘진천동지’의 표현을 하였는가?

5,18 당시에 전남매일신문사 사회부기자로서(1974∼1981) 광주사태를 현장에서 겪었고 언론인으로서 최초로 금단의 성역으로 판도라상자가 된 ‘5,18 광주사태’의 논의가 담긴 증언집은 매우 민감하고 위험스러운 작업이기에 극찬을 받을 만한 용기 있는 쾌거라 할 수 있다.

김동문 선생이 왜 이 책을 쓰려고 붓을 들었을까?

그것은 황제에게 모진 모욕과 고문을 당하고 마침내 궁형을 당하면서도 진실을 역사에 알린 사마천(司馬瀳)같은 역사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광주와 전라도를 진실로 사랑하기 때문에 온 국민이 동의하고 있지 않는 :5.18광주사태“에 대하여 진실을 토로하고, 온 국민의 동의를 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광주사태 이후로 광주와 전남, 북의 민심과 정서는 집단 이기주의가 팽배하고 전라도를 기반으로 김대중과 수많은 정치인, 언론인, 문화인들이 광주사태를 미화하고 이용해 선전선동으로 민심은 돌변했고, 선거 때마다 소위 전라도당(黨)같은 정당이 몰표를 받아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광주사태의 억울한 주검들을 이용해 김대중은 대통령까지 될 수 있었고 그의 후계자인 노무현도 일면식이 없는 전라도인 들이 몰표를 주어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었다. 무소불위의 대통령직 권세를 이용하여 국민혈세를 멋대로 ‘대북 퍼주기’인 햇볕정책으로 일삼았다. 성금은 북한의 기습도발만 초래했을 뿐이기에 햇볕정책은 이적행위요, 반역행위로 결론이 났다. 그뿐인가? ‘6,25 전쟁’때 전상(戰傷)으로 병상에서 고통 받고 있는 군경을 반통일 인사로 만들고, 북괴 김일성왕조를 건설키 위해 투쟁하고 전사한 붉은 전사들을 미화하고 보상 받게 하는 좌익 세상을 열었다,

2010년 7월 9일 김동문 선생은 “5.18실체규명위원회 회원들과 광주 서구 5.18기념회관 앞에서 5.18부상자회 70여명의 회원들이 화염병을 들고 나타나 집단폭행을 가했다.<주석=>7.9 광주 테러사건

5.18 광주사건은 김영삼 정권에 의해서 법적으로 “5.18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되고 있으나, 실체규명이 안된 사건들로 인하여 현재까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어 5.18실체규명위원회가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미해명 사건들에 대해서 영호남의 화합과 대한민국의 미래를 도모하자는 취지에서 2010년7월9일 광주를 방문하였다.

광주를 방문하기 전에 보도 자료를 통해서 광주에 내려가는 목적과 기자회견의 취지에 대해서 해당 언론과 광주학살의 주범은 대한민국국군이 아니라 북한의 김정일 정권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간다는 것을 확실히 하였다.

또한 대한민국국군이 광주학살의 주범이 아니라는 증거가 미해명 사건들에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음에도 지금과 같이 내부의 자중지란을 계속 유발시킨다면 이는 우리 모두의 공멸을 자초하고 광주학살의 직접적인 당사자인 북한의 김정일 정권에는 면죄부를 주는 일밖에 안 된다는데 대해서도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나 5.18관련 단체들은 화염병까지 준비해놓고 대기하고 있다가 5.18실체규명위원회 회원들이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집단으로 몰려와 백주대낮에 테러를 감행하였다.

5.18실체규명위원회 회원들이 폭행을 당하면서도 광주에온 목적은 싸움을 하러 왔거나 광주민주화항쟁을 폄하하러 온 것이 아니라 광주사태의 진실을 통해서 서로의 오해를 풀고 협력하자는 취지에서 왔다고 설명함에도 5.18단체들의 무자비한 폭력은 계속되었다.

5.18실체규명위원회는 5.18세력들의 폭력으로 전치 4주 1명, 전치 3주 1명, 경상자 4명에 해당하는 인명피해와 행사진행 장비들이 파손되는 등 대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정확한 집회신고절차에 따라 진행되는 행사였고, 당사자들을 자극할만한 별도의 내용이 없었음에도 5.18관련단체들의 깡패 같은 행위는 자유민주주의사회에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행위임이 분명하고 이와 같은 행위에 대해서 타당한 법적처벌을 받아야 된다는 취지에서 5.18실체규명위원회는 2010년 8월 19일 오전 12시 서울 영등포 경찰서에 해당 단체와 폭도들에 대해서 고소장을 제출하였다.

민주주의에 대한 초보적인 교육도 되어있지 않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밥그릇은 자기들의 것이라고 마냥 우겨대는 것도 꼴불견이지만 북한에 의해서 저질러진 광주사태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파헤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폭행할만한 아무런 근거도 없이 백주대낮에 화염병과 주먹을 휘둘러 상처를 입혔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법에서 알아서 당사자들에게 해당한 처벌을 내리겠지만 폭행에 가담한 5.18관련단체와 주동자들은 무엇 때문에 어떤 이유로 정상적인 집회신고를 내고 합법적으로 광주를 방문했던 5.18실체규명위원회 회원들을 폭행했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밝혀야 한다.

5.18실체규명위원회는 이번 7월9일 사건이 관행적인 흐름으로 진행되어 오던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에서 잘잘못을 따지고 대충 정리되던 사건들과는 분명히 그 성격이 다는 것을 경고하며 5.18단체들을 비롯해서 폭행에 관여했던 폭도들은 해당행위에 대해서 응분의 댓 가를 반드시 받게 만든다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7월9일 성명서에서도 지적한바 있지만 목과 팔이 잘린 채 잔인하게 살인당한 여성의 시체와 이러한 동영상들이 어떻게 돼서 보안 속에 있던 광주현장을 벗어나서 북한의 텔레비전에서 까지 생중계 되었는지 

누구도 광주시민의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광주교도소 습격사건과 과연 어떤 사정으로 6번씩이나 교도소를 공격해서 죄수들을 해방시키려고 했는지

망월동 묘역에 주인 없이 방치되어 있는 신원미상 자들의 정체는 무엇이며 대한민국에 이들의 주인이 없다면 신분이 무엇인지

총상으로 사망한 사람들 중 진압군이 아닌, 시민군이 소지한 총기에 의한 사망자가 70% 가까이가 되는 이유는 무엇인지

수십 명의 경찰들을 인질로 잡는 등, 시민군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공로로 2억 원의 보상금 까지 받은 광주사태의 주역 윤기권이 북한으로 도주한 이유가 무엇인지

1980년 5월 16일 전남 보성군 득양면 앞바다로 침투해 들어왔다가 잡힌 간첩 이창룡(본명 홍종수 48세)의 실체는 무엇인지

김대중은 무엇 때문에 5.18광주사태 시점에 반역에 해당하는 내각명단을 만들어서 집에 숨겨두고 있었는지

위의 문제들은 광주사태 당시에 벌어진 일들이고 아직까지 미해명으로 남아 있는 문제들이 분명하다는 것을 5.18단체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교란작전에 가장 깊숙이 말려들어서 피해를 본 사건이 바로 광주사태이고 호남을 이용해서 북한공화국을 세우려고 했던 김대중의 반국가적인 놀음에 놀아나서 애매한 국군을 적으로 만든 사건이 바로 5.18 광주사태라는 것을 5.18세력들은 똑바로 알아야 한다.

이번 광주사건을 정리하는데서 현장에 있던 경찰관들의 철면피하고 비협조적인 태도와 직무유기에 해당하는 행동들에 대해서도 반드시 책임을 묻지 않을 수가 없다.

5.18실체규명위원회는 이번 사건이 법리공방으로 끝나는 단순한 형사사건이 아니라 5.18광주사태의 실체를 밝힘과 함께 대한민국이 하나가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순진한 청년학생들의 평화적인 시위를 이용해서 국가를 전복시키려고 했던 김정일 일당과 결탁해서 무고한 광주시민을 희생양으로 만들고 대한민국국군을 광주의 학살자로 만든 김대중일당과 친북세력들을 국민의 심판대에 세우는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바이다.

2010년 8월 19일

5.18 단체의 백주대낮 폭행에 경악한다!

2010년 7월9일 오후 2시경, 광주광역시 자유공원 앞에서‘5.18광주사태’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사전 관할경찰서에 집회허가를 받아 기자회견과 사진전시회를 준비하던“5.18실체진상규명위원회” 30여명의 회원이“5.18부상자회”라는 단체회원 60~70여명으로부터 집단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5.18 광주사태는 5.18 특별법 제정과 역사 거꾸로 세우기 재판으로 우리의 역사가 왜곡되고 국가와 국군의 정체성마저 심각하게 훼손된 있어서는 안될 사건으로서 6.25 한국전쟁 다음으로 큰 민족적 비극이었다. 

“5.18실체진상규명위원회”가 광주자유공원에서 기자회견을 하려는 목적은 “대한민국의 미래와 화합”을 위해서 5.18사태시 계엄군과 전혀 관계없는 70%의 총상자, 아직까지도 신원이 확인되지 않는 12구의 사망자, 당시 북한TV에 연일 방영된 잔혹한 살상자의 실체 등 미스테리들의 진상 규명이 절실하다는 판단과 염원 때문이었다.

“5.18실체진상규명위원회”는 금번 백주에 공권력이 지켜보는 가운데 저질러진 5.18단체의 폭도화가 두렵지 않았으나 대한민국이 절실히 요구하는 국민화합의 길이 멀고 험하게만 느껴져 안타까움과 슬픔을 가슴에 묻고 발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5.18단체가 광주민주화 항쟁의 진정한 일원이라면 민주화 운동을 욕보이는 폭력을 휘둘러서야 되겠는가! 이번 사건은 “5.18진상실체규명위원회”의 비폭력적 대응이 차라리 훨씬 도덕적 우위를 보여 주었다.

이번 집회를 승인한 대한민국 경찰은 해당 장소에 사복 경찰 30여명과 전경 100여명을 배치하였지만, 이들은 폭행을 방관하였고, 폭행자들을 체포하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중상을 당한 피해자 2명의 긴급후송을 위해 나가는 119차량의 앞을 가로막는 “5.18단체” 회원들을 제재하지도 못하였다. 과연 이들이 국민을 보호하는 대한민국의 경찰인가! 또한 현장에 출동하였던 기자들도 신문에 글 한줄도 싣지 못하였는데 과연 대한민국의 신문과 방송은 죽었는가?

행을 당한 사람중 중상자는 현지 병원에서 입원 가료중이라는 바, 피해자 측에서는 당연히 집단폭행을 방관한 경찰과 폭행자들을 검찰에 고발하여야 하며, 사법부는 법에 의한 엄중한 심판을 내려야 할 것이다!

우리는 검찰과 사법부의 조치과정을 엄중히 지켜 볼 것이다.

우리는“5.18실체진상규명위원회”가 이번 폭행사고에 위축되지 않고 국가의 소명인 국가정체성 회복과 국민화합을 위해 실체 규명노력에 중단 없는 노력을 다 해줄 것으로 기대한다. 또한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여러분 곁에 함께 할 것이며, 진실과 정의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20010년 7월 14일

5.18북한군개입규명위원회 의장 류 기 남

5.18 실체규명위원회 폭행 4명 벌금 처분

광주지검은 17일 5.18 실체규명위원회(대표 이화수) 등 시민단체 회원들을 폭행한 부상자회 등 5.18 관련 단체 회원 조 모씨에게 벌금 900만원을, 이 모씨 등 3명에게는 각각 벌금 600만원을 처분했다.

이들은 지난해 7월 9일 실체규명위원회가 광주를 방문, 행사에 앞서 ‘북한 특수부대 개입설’ 등 5.18 실체 규명을 촉구하는 주장이 담긴 성명서를 낭독하려는 순간 이를 저지하면서 몸싸움을 벌여 실체규명위원회 측 2명에 부상을 입혔다.

[자유민주·시장경제의 파수꾼 - 뉴데일리/newdaily.co.kr]

5.18실체규명위원회 반론보도<연합뉴스>

※본사는 지난 7월9일자 지방뉴스로 `5.18 북한 배후설 극우단체-5.18 단체 몸싸움'이라는 제목으로 5.18 실체규명위원회에 대해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5.18실체규명위원회는 "광주와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하여 5.18의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고자 하는 단체로써 극우단체가 아니며 또한 행사 당일 몸싸움이 아닌 일방적인 집단폭행으로 회원 3명이 다쳤고 이로 인해 행사는 시작도 하지 못했다"고 알려왔습니다.

그 이유는 성역 같은 5.18 광주민주화 운동을 다른 시각을 갖고 시비의 화제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선생이 집단폭행을 당할 때 5.18부상자회 회원들이라고 밝히는 사람들은 74세에 이르는 탈북자 할머니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면서 “너희들은 살아서 집으로 못 간다”고 외치고 마구잡이로 폭행을 하였다.

5.18민주화“측은 표현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주장 하면서 자신들과 다른 견해를 피력하면, 떼거지로 몰려와 집단 구타를 하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선생은 20세기 전남 나주에서 태어나 유년기에 김일성이 야기한 6.25동란을 겪었고, 전후 격동기를 살아오면서 60년대 자유 십자군의 일원으로 월남전에 참전하여 국위선양에 이바지 하였다.(월남참전전우회 초대 전라남도회장89-91년)역임)그는 20대 후반에 전남매일신문사에 재직하던 중 1960년 5.18광주사태를 현장에서 직접 체험하였다.

(그는 (사)월남참전전우회 전라매일신문사 사회부 차장으로 재직하며 ‘5,18 광주사태’를 겪을 때, 필자는 무위사(전남 견지동 소재)의 기관지인 불교신문사 편집국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필자는 육본의 협조요청으로 불교대정부 무장투쟁을 포기하게 하기 위해 광주사태의 현장에 나가 있었다. 필자가 상무대(尙武臺) 사령관 소준열 소장과 함께 시민군들의 무장해제를 논의하고 있을 무렵(80년5월22일), 같은 시기에 김동문 선생은 향리인 나주에 있는 예비군대대에서 예비군들과 함께 들불처럼 전라도 전역에 번져가는 무장반란(당시용어)에 대한 진압작전을 논의하고 있었다.

끝으로 호남에서 유일하게 광주사태의 진실을 밝히는 김동문 선생의 책이 각성제가 되어 해마다 광주에서 북한정권과 공동으로 벌이듯 하는 ‘국군 죽이기’에 종지부를 찍고 국민과 5.18측이 해원상생(解寃相生)이 있기를 거듭 간망하며 호남의 용기 있는 언론인 김동문 선생께 한없는 경의를 표하며 고귀한 책 발간에 찬사를 보내는 바이다.

 2011년 2월 치악산 기슭에서...法徹(전 불교신문 편집국장,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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